난 요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24번에 폭 파져 있다.
Mozart Piano concerto No.20
Mozart Piano concerto No.24
Piano clara haskil
conductor Igor Markevich
듣고 있노라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한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클라라하스킬 피아노 연주의 이고르 마르케비치 지휘의 음반을 들어보라.
내가 근 10수년만에 처음으로 산 음반이다.
정말 아깝지가 않다.
아래는 모셔온 글이다.
<클라라 하스킬, 196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녀는 거의 피아노의 성자로 살았다.> 독일의 비평가 요하임 카이저는 그의 저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하스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하스킬은 1895년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났다. 스페인계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딸 중 두번째였다. 언니 릴리는 피아노를 배웠고 동생 안느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스킬도 처음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같이 배웠다. 이를테면 전형적인 음악 가정인 셈이었다.
비록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마치 모차르트를 연상하게 만든다. 아직 여섯 살이었던 때 그녀는 모차르트 소나타의 한 악장을 단 한번 듣고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따라쳤다. 물론 악보를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뿐인가. 그 악장 전체를 다른 조로 바꾸어서 쳐내기까지 했다.
그 즈음해서 클라라는 브람스와 요아힘의 친구였떤 안톤 도어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준 적 있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스》에서 도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기적이다.>
1905년 열 살의 나이로 뵈젠도르프 협회에서 솔로 리사이틀로 데뷔했다. 이듬해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가브리엘 포레에게 배웠다. 1907년에는 알프레드 코르토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3갸월이 지나자 코르토는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열다섯 살 되던 1910년에 파리 콘서바토리를 졸업했다. 졸업 시험관은 포레, 에네스쿠, 모츠코프스키 같은 당대의 쟁쟁한 음악가들이었다. 그녀는 최고 상을 받았고 이 떄부터 그녀의 연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바이올리니스트 아자이의 반주자로도 기용되었으며 루마니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에네스쿠와 협연하기도 했고, 파블로 카잘스와도 협연했다.
1911년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던 페루치오 부조니가 열여섯 살의 클라라를 불렀다. 부조니 자신이 편곡한 바 있는 바흐의 「D단조 샤콘느」를 주문했고클라라는 그 곡을 즉석에서 쳐내려갔다. 감동한 부조니는 베를린에 와서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권유했다. 『뉴 그로브』사전이나 기타 자료에는 그녀가 이 시기에 베를린으로 가서 부조니의 제자가 되었다고 나와 있지만 하스킬 연구가인 마르크스 해리슨은 어머니 때문에 베를린으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어쩄거나 엄청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소녀였다는 것은 여러모로 확실하다.
1912년에는 파데레프스키가 미국 공연을 주선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려 할 때쯤인 열여덟 살의 나이에 전쟁과 함께 첫 시련이 다가왔다. <세포 경화증>이라는, 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버리는 불치병에 걸린 것이다. 이후 4년에 걸쳐 그녀는 몸에 깁스를 댄 채 살아야 했다. 1921년까지 연주회를 가질 수 없었으니 무려 8년간의 공백을 가져야 했던 셈이다. 연주자에게 8년의 공백이란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무시무시한 시련은 이 병의 후유증이었다. 젊은 시절의 클라라는 몽환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병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곱추가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곱추로 변해 버린 이십대의 아가씨를, 그 후로 평생 그 모습을 지녀야 했던 한 여인을.......
말년에 이르러 하스킬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행운아였습니다. 나는 항상 벼랑의 모서리에 서 있었어요.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한번도 벼랑 속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피할 수 있었다는 것 _____ 그래요. 그것은 신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연주를 재개한 하스킬은 1924년부터 캐나다와 미국 연주를 가졌고 1926년 영국에서의 첫 연주회를 가졌다. 1927년 파리에서 이자이와 함께한 베토벤 소나타 연주회는 그녀의 인기를 회복시켰으며 이때부터 1949년까지는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다. 파리에선 당시 음악계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폴리냑 공작 부인에게서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고, 공작 부인의 살롱에서 개최되는 <음악의 밤> 행사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이번엔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남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뇌졸증을 일으켰다.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으며 각종 신경계에도 종양이 생겨 긴급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유태계 의사가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달려왔고 어려운 수술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스킬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다시 벼랑에서 돌아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까지 약 2년동안 하스킬은 마르세유 근교에 숨어지내야 했다. 당시 그녀가 가진 것은 바이올린 한 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9년에 스위스로 망명한 하스킬은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활동하다가 196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1963년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클라라 하스킬 국제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오늘도 살아서 연주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대화는 사고를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독은 천재를 만든다.> 물론 몇몇 음악적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항상 고독했다. 그녀의 일생은 고독한 동시에 위험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고독 속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누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면 그녀는 고개를 반쯤 돌려서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는 극도로 수줍어했다. 얼핏 보면 마치 자신의 고유한 개성이라곤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마르크스 해리슨의 예기다.
성격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무엇을 과장하거나 밖으로 발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루빈슈타인이나 호로비츠 등에서 발견되는 음악적 쇼맨쉽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항상 말이 없고 수줍어했다. 미국의 한 매니저는 <만약 그녀에게 재능이 좀더 부족했더라면 오히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이로니컬한 말을 던진 적 있다.
병약한 그녀는 매일처럼 연습할 처지가 아니었다.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 때문에 많은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배우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다 할 스승을 얻지도 못했다. 코르토에게 배운 적 잇으나 당시 코르토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였다. 결국 그녀에겐 타고난 천재성과 영혼의 세계가 있을 뿌니었고 그녀는 스스로 이 영혼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까다로운 <고독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녀와 관계한 모든 음악가들이 하스킬에 대해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다>라고 증언한다. 겸손이 지나쳐 항상 자신의 연주가 부족하다고 한탄했다.
「청소부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연주하는 것 외엔 무엇 하나 몸에 익힌 게 없으니......」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도 그녀는 이렇게 한숨 짓곤 했다.
타고난 성격과 병과 전쟁 때문에 그녀가 그나마 꾸준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1950년대의 십여 년이 그녀의 주요 활동기였다. 이 기간동안 그녀는 앙세르메, 몽퇴, 스토코프스키, 카일베르트, 마르케비치, 첼리비다케, 프리차이, 쿠벨릭, 줄리니, 카라얀 등과 협연했다. 카잘스, 안다, 이자이 등과도 연주했고 이것으로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쯤 되어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의 내 연주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는 생각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선 모든 사람이 내 연주를 듣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그러나 말기의 그녀는 항상 죽음을 의식했다. 특히 파리 연주회에서 심장 장애를 일으킨 이후로 이런 생각은 더욱 심해졌다. 연주 중에 자신이 생이 끝날 것이라는 강박 관념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녀에겐 항상 그날의 연주가 생의 마지막 연주엿다. 연주가 끝나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번에도 또 집행 유예가 내려졌군요」
1960년 12월 하스킬은 파리에서 그뤼미오와 함께 <소나타의 밤>을 가진 후, 다음 공연을 위해 기차로 브뤼셀에 갔다. 역의 꼐단을 내려오던 하스킬은 순간적인 현기증을 일으켜 계단에서 굴렀다.
의식 불명 상태로 실려간 그녀는 병원에서 잠시 의식을 찾았다. 그녀는 파리에서 달려온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구나. 그뤼미오 씨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주렴」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어버렸다.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하스킬은 이튿날 아침 모차르트가 먼저 가 있는 곳으로 여우언히 떠나고 말았다. 예순여섯 살 생일을 한 달 남겨놓은 1960년 12월 7일 이른 아침이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모차르트
클라라의 천재적 직관력과 기억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쇠하는 일이 없었다. 몇 가지 기록들을 들춰보자. 1937년 그녀의 나이 마흔 두 살 때 갑자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 곡을 이틀 만에 완전히 암기했다. 또 한번은 스위스에서 연주하기로 한 호로비츠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불안해진 지휘자 헤르만 셰르헨으로부타 급하게 대역을 부탁받은 적 있다. 이때 하스킬은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말그대로 한나절 만에 암기해 버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아노 파트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총보를 포함한 곡 전체를 외워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함께 연주했던 연주가들은 하스킬의 손가락이 엄청나게 길고 넓게 벌어졌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가 손을 펼치면 부채가 펴진 모양이 되었으며, 새끼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이 손목에 직접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레코드 팬에게 클라라는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연주가>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연주회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녀의 레파토리가 생각보다 넓고 다채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스킬의 초기 레파토리에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 브람스 「협주곡 2번」, 생상의 「협주곡 5번」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26년 12월 24일 그녀와 슈만의 협주곡을 협연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는 그녀의 연주가 불처럼 열광적인 것이라고 표현했다. 쇼팽 「협주곡 2번」을 협연한 줄리니는 그녀와의 연주가 자신에게 최고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코벤트 가든에서 앙세르메와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언론은<클라라 슈만이 연주한다 해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1952년 루체른 음악제에서 그녀와 함꼐 쇼팽의 협주곡을 연주한 후 존 바비롤리는 이렇게 말했다.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나자 쇼팽 자신이 연주해도 이런 식으로 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후로 이 곡에 대한 나의 불만은 사라져버렸다」
원래 하스킬의 부모는 스펭니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파야의 스페인 정원의 밤이나 알베니츠, 그라나도스 등 스페인 작품들도 즐겨 연주했고 레코딩도 내놓았다. 현대 음악에는 별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힌데미트의 「네 가지 기질」이나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을 연주하여 격찬받은 일도 있다.
레코드로 남아 있는 그녀의 레퍼토리를 살펴보자.
일찍부터 일류 음악가들과 활동했음에도 하스킬의 레코드 녹음은 1947년 쉰두 살에 이르러 처음 이루어졌다. 제키가 지휘한 런던 필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이었다. LP 시대에 이르러 처음에는 위스트민스터, 이어지는 필립스의 전속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10년간(1951 - 1961) 십수 장의 LP를 녹음했다. 다른 레이블에서의 녹음도 몇 장 있고 또 라이브 녹음도 지금에 와서 CD화된 것이 몇 장 있다.
사가(私家)반으로 1947년 런던에서 라디오 레코딩된 부조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같은 것이 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카잘스, 에네스쿠와 남긴 녹음, 파리에서 공연한 이자이와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도 녹음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한 라무뢰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녹음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필립스 442684)를 들어보면 감정의 심한 기복을 절제하면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시정으로 충만한 쇼팽을 들을 수 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과 「어린이 정경」, 「숲의 정경」, 「아베크 변주곡」을 담은 음반(필립스 420851)에선 그녀가 낭만적 음악에 정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뤼미오와 함께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필립스 442626 - 442628)이다. 내용 면에서 모차르트 소나타에 뒤지지 않는 명연이다.
이제 그녀의 모차르트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많은 음악가와 평론가들이 그녀의 모차르트에 대해 찬양했다. 같은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는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모차르트>라고 찬탄했다. 『이 한장의 명반』의 저자 안동림은 <천의무봉>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어떠한 꾸밈도 없고 과정도 없이 다만 마음을 넣어 음을 굴리는 것만으로 만인의 가슴에 파고드는 감동을 느끼게 해준 것이 바로 그녀의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아름다움, 특히 하스킬의 모차르트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그 앞에 서면 공통적으로 언어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하튼 하스킬은 과거 존재했던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자의 한사람이며 그녀가 남긴 모차르트 녹음의 대부분이 주옥과 같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녀의 연주를 직접 접한 사람들은 >레코드를 통하여 듣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 연주는 더욱 더 훌륭했다>라고 말한다.
특히 <역사적 명반>대열에서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마르케비치가 지휘한 라무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고 20번, 24번」(필립스 412254)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개월 전인 1960년 11월 14일부터 18일 사이에 스테레오로 녹음된 <백조의 노래>이다. 마르케비치의 지휘가 조금 불만스럽긴 하지만 하스킬의 깊고 오묘한 음색이 모든 불만을 무너뜨린다.
하스킬의 모차르트를 말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1956년에서 1958년 사이에 녹음된 아르투르 그뤼미오와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클라라 하스킬, 196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녀는 거의 피아노의 성자로 살았다.> 독일의 비평가 요하임 카이저는 그의 저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하스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K.301, K.304, K.376, K.378을 담은 음반과 K.454, K.526을 담은 음반이 발매되었다.(필립스 412253 416278)
아들 뻘 되는 그뤼미오를 다독거리며 엮어가는 K.378의 청명함이나 K.394의 우수는 들을수록 새롭다. 하스킬은 원래 바이올린을 연주한 바 있어 바이올린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풍부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프랑코 - 벨지언 유파의 맥을 다진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이자이, 에네스쿠와 계속 교감해 온 하스킬과, 에네스쿠의 직계 제자인 그뤼미오의 만남이 프랑코 - 벨지언 학파의 바이올린 소나타 해석을 보여주는 전범을 창출한 것이다.
그밖에 바움가르트너가 지휘한 「피아노협주고 13번」과 프리차이 지휘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피아노 소나타 K.280」, 「변주곡 K.265」를 담은 음반(DG 437676)도 하스킬의 모차르트를 이해하는 데 좋은 음반이다.
참고로 하스킬의 음악 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립스에서 발매된 「하스킬 전집」을 권한다. 협주곡, 실내악, 독주곡의 세 파트로 나누어 총 열두 개의 CD에 그녀의 연주들을 집대성해 놓았다.
러시아 피아노계의 대모 타니티아 니콜라예바가 처음으로 잘츠부르크를 방문할 때의 일이다. 떠나기 전 러시아 음악인들은 니콜라예바에게 <서방에 가거든 카라얀이란 지휘자의 콘서트에 꼭 가보도록 해, 그는 새로운 토스카니니로 알려져 있어>라고 조언했다. 때마침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모차르트 연주회가 있어 이에 참석했다. 당시의 협연자가 클라라 하스킬이었지만 니콜라예바로선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피아노의 거장이 토로한 하스킬에 대한 감동을 요약하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
<그녀의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건반으로 손을 옮기자 나의 볼에는 곧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실로 내가 평생 동안 들은 최고의 모차르트 전문가였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다시 울려퍼질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풍부하면서도 자연스런 음이 오케스트라로 전달되어 지휘자마저 마술에 걸려 있었다. 그녀 덕택에 그들 모두는 음악적 진실을 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가 되었다.>
나에게 피아노소리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분명 하스킬의 연주는 그녀의 나이가 한참 들었을 때 연주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스킬의 젊은 시절 모습이 더 좋다. 그녀의 아픔을 외면하고 싶은 것도, 내가 그녀의 외모 지상주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피아노소리가 오히려 젊은 시절의 모습과 매치업되는 듯 해서다. 굉장히 여리고 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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